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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뉴소피플#3 - 한우 파동을 견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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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니는 푹 쉬면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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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는 연휴도 끝났고, 쉬어가는 느낌으로

뉴소피플의 세 번째 이야기를 담은

스페셜 레터를 준비해 봤어요. ✨

※ 이번 주는 추석 연휴로 한우 가격 정보가 없어요.

뉴소피플#3 이반농장 이근수 대표님
한우 파동을 견딜 힘 🐂
뉴소 유튜브 | 뉴소피플 #3 | 한우 파동을 견딜 힘 (이반농장 이근수)
Q. 이반농장의 시작
A. 지금 입문한 지는 44년 됐습니다. 규모는 천 두가 좀 안 되는 것 같아요. 일관사육 하고 있고요. 예, 그 정도입니다. 이름은 이반농장이고 어릴 때부터 우리 어른들이 '너 커서 뭐 될래?' 하면 소 기르는 농장 한다고 그랬대. 근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학교 시험 볼 때는 현실적이게 되잖아요. 어디가 이 사회에서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있는지 그런 걸 따지면서... 전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랬는지 아무 갈등 없이 축산을 전공을 했죠.

  제가 72년도 대학 때 일주일에 한 번씩 4시간인가 농장 실습이 있는데, 덕소에 농장이 있었는데 소를 키우고 있더라고요. 젖소를 키우고 있는데 제가 무서워서 옆에 가지를 못했어요. 처음으로 소를 본 거야 그때 실물을. 얼마나 제가 무식했냐면 젖소면 다 젖 짜는 줄 알았어. 수컷도 젖소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꿈만 갖고 왔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모르고 들어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들어오면서 부정축재자들의 돈을 환수를 했어요. 그 돈을 환수를 해가지고 영농 후계자들을 뽑아서 어떤 경종농가들은 300만 원, 축산농가들은 600만 원, 그 돈 받아서 이제 소를 키우기 시작했죠. 그게 81년도인가? 그걸로 다섯 마리 사가지고 시작을 했죠.

  그때 제가 한우를 시작한 게 아니고 착유를 했습니다. 그때 고기소라는 개념이 없을 때예요. 그때 우리 한우산업을 보면 30%는 역용으로 소를 키웠고, 60~70% 가량은 고기소가 막 만들어질 때 그냥 뭐, 집에서 나온 부산물 볏짚이나 쌀겨 그런 것들을 소죽거리 해서 먹이고, 그런 상태의 아주 혼란기였죠. 그때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착유기를 가지고 젖을 짰지, 착유기 살 돈이 없어서 우리는 손으로 젖을 짜는… 한 2년쯤 했나요, 제가? 그 우유통에 담아가지고 우리 집 농장까지 차가 안 들어오니까 큰 길까지 내다 주고. 그렇게 젖소를 하면서 마침 그때 덴마크와 전라북도가 자매결연을 했어요. 그래서 매년 15명씩 선발을 해서 6개월 동안 덴마크에 보내서 실습도 하고, 공부도 하고, 85년도에 거기에 선정이 돼서 덴마크를 가죠. 여기 있는 것을 다 팔고.

  뭐랄까... 꿈같은 상황을 그때 처음으로 접한 거야. 아, 이렇게 소를 키우는구나. 제일 낙후된 데서 제일 선진이 된 곳을 가보니까 모든 것이 경이롭죠. 그때 내가 실습 간 농장이 186마리의 소를 키우고 있었는데, 나는 언제 저런 농장을 만들어 보나... 그래서 산업에 대해서, 또 소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배우려고 노력하고, 갔다 와서 제가 착유를 안 합니다. 안 한 이유는 그때 고생이, 옛날에 2~3년 동안 손으로 착유했던 고생이 생각나고, 우선 당장은 생활해 내야겠다 해서 홀스타인 수놈을 비육시킵니다. 홀스타인에 초유떼기 사다가 분유로 두 달 동안 키워서 분유떼기 만들고, 그것을 사료 줘서 비육시키는. 그때는 우리가 고기 질로 고기를 먹은 게 아니라 양으로 먹었거든요. 소고기만 먹으면 됐지, 이 고기가 맛있니 맛없니 질기니 안 질기니 그런 개념이 없었어. 그래서 한우 가격보다, 한우 암놈 가격보다, 젖소 수놈 가격이 더 좋아. 소고기니까. 한우 수놈이 제일 가격이 비싸고, 그다음에 홀스타인 수놈, 그다음에 한우 암놈, 그다음에 젖소 젖 짜다가 나오는 소들, 그렇게 가격 차이가 됐었죠.

  그때 5~6년간 꽤 재미를 봤죠. 근데 이제... 송아지가 원료인데 원료 가격이 자꾸 올라가잖아요. 내가 수지가 맞을 수 없다. 그래서 그때 제가 송아지를 만들어야겠다 해서 한우 암놈을 들여오게 됐죠. 그게... 89년도 말, 90년대 초? 그때 이제 번식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온 거죠.


Q. 암소 사양관리의 실패 경험

A. 덴마크에 갔다 왔잖아요. 아주 어마어마한 규모의 농장에서 내가 실습을 했잖아요. 나는 언제 저런 농장을 만들까 그랬죠. 그래서 그때 내가 밑소 가격이 자꾸 오르길래 그 밑소를 내가 생산해야겠다 싶어서 그걸 처분을 하고 한우 50마리를 한꺼번에 들이죠. 50마리를 들여서 번식, 일괄사육을 그때부터 시작하게 된 거죠. 농장을 하려고 그러면 우선 돈이 있어야 되고, 땅이 있어야 되고, 기술이 있어야 되잖아요. 난 이 세 가지가 다 없어요. 돈도 없고, 땅도 없고, 기술도 없고. 대학교에서 배운 거 아무 필요 없어. 

  그때 어떻게 제가 실패를 했냐면 처음에 20마리, 30마리씩 큰 울타리 안에다가 한우 암놈을 풀어놓고 종모우를 거기다 자유교배식으로 넣어놨죠. 그리고 먹이는 자유급여. 볏짚도 충분히 주고, 농후사료도 충분히 주고, 살도 찌고 새끼도 낳고, 양쪽으로 돈 벌려고 그런 생각을 했었죠. 했는데 새끼를 낳았잖아요? 50마리를 새끼를 내서 내가 30마리를 실패했어요. 죽였어. 근데 그때는 몰랐죠. 번식우들이 살이 찌니까 새끼가 클 공간이 없어. 새끼가 이만 해(작아). 경관도 기름이 껴가지고 경관이 좁으니까 새끼도 난산을 해, 낳기도 힘들어 이만 한 거 나오면서. 또 농후사료를 많이 주면 젖이 이등유가 나와. 젖의 품질이 안 좋아. 그 젖 먹고도 설사해. 그래서 '아, 내가 과욕을 부렸구나' 번식하려고 하면 번식우 생리에 맞게 소를 키워야 되는데, 소를 비육도 시키고 새끼도 낳고 하려니까 안 되는 거죠.

  그때 어떻게 제가 생활을 했냐면 새끼 낳고 설사가 제일 많은데 탈수가 되면 링거를 해야 할 거 아니에요. 근데 소가 움직이잖아. 그러면 그 겨울에 링거 꽂고 송아지를 붙잡고 있어야 돼. 그리고 링거가 식으니까 또 거기 옆에다가 조그맣게 연탄불 갖다 놓고 안 식게 만들고, 하루 꼬박 새우고. 50마리에서 60% 죽이면서 내가 고생을 했죠.


Q. 소값 파동을 겪으며

A. 전두환 전 대통령 때인데, 우리 국민 중에 한 60~70% 가량이 농민들이었으니까 농촌에다가 뭔가 정책을 쓸 수밖에 없는데, 소가 농업소득에 꽤 괜찮은 품목 아니냐. 그러면서 외국에서 소를 도입해 왔죠. 근데 적당히 도입을 해 왔으면 모르겠는데 엄청나게 소를 많이 들여온 거죠. 해외에서 송아지를 고기소로 암소도 사오고, 비육우도 사오고 젖소도 사오고. 너무 많이 들어오니까, 이제 수요는 없고 공급이 많아지니까 가격이 폭락할 수밖에 없잖아요. 싸게 분양 받아가지고 송아지 새끼를 냈는데 송아지 어미 다 팔아봐야 옛날에 분양받은 소 가격도 안 나와. 그래서 그때 소 파동이 일어나는 거죠. 그리고 IMF 때 96~97년도에 가격이 좋으니까 그때 있었고, 2011~2012년도 그때 가격이 많이 좋았죠. 요는 그거 아니에요? 수요, 공급. 소는 많고 수요는 없고 하니까 당연히 소 파동이 올 수밖에 없죠.

  그거 극복을 어떻게 했냐, 전 정신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어떻게 극복을 했는지. 그냥 견딘 거야. 그리고 다른 거 할 것이 없어. 내가 이거 아니면 나는 재주가 없어서, 다른 것을 할 기술도 없고, 알지도 못하고, 이것밖에 모르는데 이것도 뭐, 아주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이거 하나도 제대로 못하면서 다른 분야에 날고 뛰는 사람이 많을 텐데, 거기 가서 내가 어떻게 경쟁을 하냐. 내가 꿈꿔 왔고 내가 그동안 해 왔고 여기서 내가 지고 나가면, 이거 극복 못하면 다른 곳 나가서는 더 못할 거 아니냐.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두 가지 방법이에요. 하나는 외부에서 돈이 들어와야 돼요. 견디려면 은행이건 아버지건 어머니건 형제건 외부에서 돈이 들어와야죠. 또 하나는 농장 규모가 줄어들어야 돼요. 이 두 가지 밖에 없어, 견딜 방법.

  옛날에는 소 다섯 마리만 팔면 인건비도 주고, 사료값도 주고, 우리 생활도 하고 했지만 지금 소값이 떨어졌으니까 다섯 마리보다 더 팔아야 할 거 아니에요. 일곱 마리, 여덟 마리를 팔아야 할 거 아니야. 그럼 농장 규모는 줄어들겠지. 입식 못하고. 그런데 지금은 또 하나 사는 방법이 있는데, 김학수씨 같이 소를 잘 키우면 돼. 10만 명이라 하면 한 5천 명, 한 5% 가량은 지금 적자 안 볼 거예요. 수지가 날 거야. 큰 수지는 아니더라도. 그리고 한 10% 정도는 적자는 아닐 거다. 옛날에는 잘 키우고 못 키우는 그런 의미가 없었잖아, 고급육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늘 통계청에서 송아지 한 두당 생산비가 497만 원으로 나왔데요. 근데 지금 300만 원이 안 가요. 그럼 200만 원이 손해가 나는데 송아지 생산하겠어요? 안 하지.

  일본은 어떤 시장이 형성되어 있냐면, 똑같은 개월령에 똑같은 바디 컨디션이야. 똑같은 화우고. 극단적인 경우지만 내 거 30만 엔 받으면 여긴 90만 엔 받아. 3배를 받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어. 그 90만 엔 주고 사 가는 사람이 바보 천치가 아니야. 90만 엔을 주고도 나한테 이익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으니까 그걸 사 가는 거예요. 우리나라도 그런 거지. 가격 차이가 꽤 나잖아요. 옛날에는 송아지 10만~20만 원 차이밖에 안 났어. 근데 지금은 2~3배 가량은 차이가 나잖아요. 우리나라도 그런 시대가 왔다.

  번식농가들은 어쩔 수 없이 팔아야 돼. 비육농가는 안 사도 돼, 다른 놈 사도 돼. 근데도 가격을 더 주고 산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보고 미래에... 경제활동이잖아요, 소 기르는 것이. 일본이 이렇거든요. 일본 시장은 번식을 하는 사람들은 돈을 벌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까 얘기한 대로 번식농장들이 돈을 못 벌잖아요. 못 버는지도 몰라 이 사람들은 부업이라. 소규모 농장들이 번식을 하고 송아지를 팔잖아요 좀 규모화된 농장, 나 같은 경우에는 송아지를 안 팔거든요. 다 내가 키우지. 번식을 하는 사람들이 돈을 벌어야 된다. 번식을 하는 사람들이 돈을 못 벌면 원료가 없는데 어떻게 산업이 유지가 되냐, 번식하는 사람들이 돈을 벌게 해주는 정책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Q. 초기 육종농가 사업의 역사

A. 2001년도에 수입 개방이 됐잖아요. 근데 1990년도 초에 10년 뒤에 개방이 되는데 우리 한우가 개방이 되면 살아남을 수가 있겠느냐. 그러면서 어떤 분위기가 형성이 됐냐면, 어떤 상품이라도 두 가지의 상품 차이가 있는 거 아니냐. 하나는 가격, 가격이 싼 것, 또 하나는 품질. 근데 한우는 가격 경쟁력이 없어. 그 중에 한 가지를 택한다면 한우를 질로 한번 경쟁을 해보자, 그런 분위기가 있는 거죠. 그래서 그때 거세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도입이 된 거예요.

  제일 처음엔 안 따라 했죠 사람들이. 왜냐하면 처음에 고급육으로 만들어 놓아 봐야 시장에서 평가도 안 해주고, 그때는 1+, 1++도 없었어요. 1, 2, 3, 등외가 있었죠. 내가 익산에서 처음으로 거세를 했을 거예요. 93년도 말인가 94년도 초에 8마리를 출하했는데, 1등급이 5마리가 나오고, 2등급이 2마리가 나오고 3등급이 1마리가 나와 그 성적표를 놓고 제가 고민을 한 거죠. 똑같은 종자, 똑같은 환경, 똑같은 사료와 물 줬는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나 혼자 나름대로 고민을 한 거죠. 지금 같으면 아주 단순한 건데, 그때 나한테는 참 이상한 거예요. 그때는 개량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인공수정만 시키면 개량인 줄 알았으니까. 옛날에는 우리나라의 챔피언 소를 만들어서, 그 정액 빼서 인공수정을 시켰으니까.

  그래서 이제 그 성적표를 놓고 고민을 한 결과, 아, 이게 종자구나. 한우도 잘 크는 놈이 있고, 육질이 좋은 놈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그때 내가 개량에 눈을 떴죠. 아, 그게 94년도일 거예요. 근데 그때는 여기에 관심 있는 사람이 없었어.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개량으로 그런 소를 만들어야겠다. 그런 소만 만들어 놓으면 난 경쟁력 있는 거 아니냐. 그때부터 개량 생각이 들었죠. 주변에도 그런 생각을, 나와 같이 공감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왜냐하면 그때 고급육 개념이 없었으니까, 90년대 초라. 제일 처음에는요, 고급육 만들어 놔 봐야, 1등급 만들어 놔 봐야, 가격 차이도 안 났어. 3등급이나 1등급이랑 가격 차이가 별로 안 났어. 근데 어떻게 규모화는 시켜야겠고, 번식은 전문화가 되지 않으면 안 되겠고 하는 사람들이 전국에 방방곡곡 있었던 것 같아. 축산기술연구소 중심으로 그런 농가들을 모았죠.

  99년도에 한우핵군육종연구회가 만들어지죠. 개량에 대한 의지가 있는 농가들이 우량 암소 집단 조성을 해야지만 우리 개량이 완성이 된다, 수놈 가지고는 한계가 있다, 좋은 밭이 만들어져야 된다, 그래서 전국에서 82농가가 모여요. 축산기술연구소를 중심으로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 둔 송아지가 시장에서 어떻게 평가를 받는지, 그리고 그게 돈과 연관이 돼야 할 거 아니야. 우리가 소를 키우는 것은 경제활동이니까. 그래서 경매 행사를 세 번을 하죠. 내 임기 동안에.

  그런데 의외로 시중 시세보다 가격을 더 받는 것들이 나오니까 집중이 되죠. 그걸 정부가 본 것 같아. '저 친구들은 암소를 우량 암소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네?' '그걸 규모화를 시키려고 노력하는 농가네?' 저런 농가들은 밭이 좋을 거니까, 암소가 좋을 거니까, 우량 암소 집단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농가들이니까, 저런 농가들의 밭을 이용해서 종모우를 생산하면 훨씬 더 개량 효과가 빨라질 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 사람들과 얘기는 안 해봤지만. 그리고 담당 직원들이 우리 경매 행사에 첫 번째는 안 오더니 두 번째, 세 번째는 오더라고. 와서 우리 경매 행사를 보는 거야. 그러면서 2005년도부터 육종농가 사업이 시작됐죠. 그래서 아마 핵군육종연구회 회원들이 여기 15농가, 20농가는 육종농가로 다시 와서 지금 이 사업을 계속 진행하고 있죠.


Q. 배냇소를 보낸 이유

A. 내 삶을 보면 전반기 20년 동안은 농장 만드는 일에 전념을 한 것 같아요. 그 이후에 20년 동안은 1999년도에 한우협회가 생기면서 제가 익산시 지부장으로 활동을 시작해요. 어떻게 보면 전 거의 꿈을 이루었잖아. 그러면 내가 이 산업의 환경에서 나름대로 이루었으면 '이 산업에다가 내가 어떤 기여를 해야 된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됐죠. 그런 생각을 하다가 생각해낸 게 '배냇소'라고, 내가 A란 농장한테 송아지를 줘. 그러면 그 송아지를 키워서 새끼를 내. 내서 큰 소를 나한테 가져오고 송아지를 가져. 그래서 내 좋은 밭을 주변에다 펼치고 싶은 그런 꿈이 있었어요. 그리고 경제적으로 좀 어려운 농가들, 그런 사람들은 그걸로 인해서 내 자본 하나도 안 들이고 노력만으로 내 소가 생기잖아요. 한 5~6년간 했나? 13농가한테 80두의 소들로 보내기 사업을 했죠.

  그런데 그걸 내가 중단한 이유가, 큰 암소가 우리 농장에 다시 들어와야 하잖아요. 다른 농장에 갔다가 그러면서 질병을 가지고 와. 육종농가는 네 가지 질병 검사를 일 년에 두 번씩 해요. 구제역, 브루셀라, 결핵, 요네 이 4가지 질병을 검사해서 한 마리도 안 나와야지 그 육종농가 사업이 지속이 돼. 그런데 나갔다가 들어오는 소에 검사를 해보면 그런 소가 나와. 그래서 '아, 이 사업이 육종농가는 쉽지 않구나' 하고 이제 그걸 중단시켰죠. 그러다가 이제 작년에 내가 시작을 했는데 그냥 내가 30마리를 내놓으면, '그것이 릴레이로 가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죠. 키우고 새끼를 내서 암송아지가 나면 다른 농가에, 또 그 농가도 마찬가지로 다른 농가에. 그렇게 가면, 언젠가는 우리 익산이 좋은 밭으로 만들어지면, 다른 지역에 소 키우는 농가보다 경쟁력이 있는 거 아니냐, 그런 생각을 갖게 됐죠. 좀 더 지켜봐야죠. 이게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저도 빚 많이 있어요. 그렇지만 뭐, 애들 거의 다 이제 키워놨겠다, 큰 돈 들어갈 거 없잖냐, 뭐, 그 정도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거 아니냐. 그리고 인생에서 돈이 다가 아니더라. 여러 가지 의미가 있죠. 지금까지는 괜찮은 거 같아요. 전 후회는 없어요.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 또 하나는 이걸 통해서 생활을 했다. 애들 키웠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난 뭐, 이 정도면 된 거 아니냐.


Q. 한우법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

A. 농촌에서 1차 산업 하면 돈 없어요. 만약에 1차 산업 해서 돈 있으면 우리나라 망할 거야. 먹을거리는 싸야 돼. 그 차액을 정부에서 지원을 해줘야죠. 우리 농업소득이 작년에 948만 5천 원이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한우법을 만들려고 하잖아요. 어떤 산업이든 간에 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경제적 지위가 안 되면 그 산업은 없어질 수밖에 없어요. 대구의 섬유 산업, 부산의 신발 산업, 세계에서 으뜸가는 품질의 섬유가 만들어지고 신발이 만들어져요. 그런데 그 산업이 지금 다 망했어요. 그 이유는 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소득이 안 되니까. 그래서 망한 거예요. 한우도 마찬가지예요. 이십 몇 년 만에 세계에서 으뜸가는 품질의 고기가 만들어졌잖아요. 만들었는데 이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소득이 안 돼. 그럼 망할 수밖에 없잖아요.

  파동 겪을 때마다 농가들 절반이 폐업하고, 도산하고, 자살하고, 그러면서 농가 수는 10분의 1로 줄었잖아요. 하나도 보호가 안 됐잖아. 이 법과 제도로 우리가 보호를 받으려고 하는데 이 법과 제도를 만드는 사람이 누구냐, 그건 입법부잖아요. 근데 우리를 대변할 국회의원이 없어. 농민 국회의원이 하나도 없잖아요. 71명이 검찰, 경찰 출신이에요. 농민이 없어. 그러니까 농민을 위한 법을 못 만드는 거예요. 법과 제도로 보호를 받아야 된다. 그거 아니면 계속 파동 올 때마다 절반씩 없어지면 이게 뭐가 되냐. 소만 잘 기르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대접을 받는 그런 판이 만들어져야 제대로 된 판 아니냐. 그 바탕이 한우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아주 오래전에, 십 몇 년 전에 전라북도에 박민수 의원이라고 농해수위 의원이 있었는데, 그분 통해서 한번 추진을 하려다가 그때는 상임위 발의도 안 되고, 초안만 만들어 놓고 끝난 적이 있거든요. 근데 이번에는 국회 본회의까지 올라왔잖아요. 그걸 만들어 주고 가는 것이 우리 1세대들의 역할 아니냐. 우리 아들한테도 그런 지적을 받아요. '아빠, 왜 그렇게 활동을 하냐' '아무것도 생기는 것도 없고, 욕만 얻어가면서' 그런 지적을 받아요. '왜 바깥으로만 나도냐' 그런 지적을 많이 받는데, 경찰서 근처에 안 가봤는데 연행당하고, 조사 받고, 유치장에 갇히고, 판사 앞에 재판받고, 물론 감옥은 안 갔는데 그런 일들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뭐, 그거 몰라줘도 좋다. 한우법만 만들어 주면 좋다. 한우산업만 지속 가능하게, 지속 가능하려면 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보장이 돼야 한다. 사회적 지위는 그렇다 치고 경제적 지위가 있느냐? 없다. 948만 5천 원이다, 농업소득이. 그러면 이게 굉장히 불공정한 사회 아니냐. 이런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이 공정한 사회 아니냐.

  농가들은 당장 눈앞에 내일 모내기 하는데, 농약 주는 데, 그런 데 관심 있어서 못 나서죠. 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당장 눈앞의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니까. 그래요, 우리 농민들이 그래요. 포기 안 하면 된다. 근데 어떻게 보면 농업이 우리 산업화의 기초가 된 거 아냐, 이렇게 된 것은 싼 먹을거리, 싼 노동력, 다 농민들이 가서 싼 노동력 제공해주고 싼 먹을거리 제공해줬잖아. 그래서 나라가 이렇게 된 건데.

  옛날에 소값이 떨어지면 수매 같은 걸 해줬다고. 정부에서 격리를 시켰는데 요즘에는 그것도 없잖아. 작년에 우리 익산은 기후변화로 엄청난 피해를 많이 입었어요. 논이 물에 잠기고, 소 키우는 농가들의 십 몇 % 이상이 소막까지 물이 들어와서 피해를 많이 입어서 재난지역으로 선포됐거든요.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들만큼 자연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없어. 제일 적응력이 강한 나라가 우리나라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환경에 적응을 잘하는 분야의 사람이 농민이야. 농민들은 다 어떻게든지 견뎌, 견뎌내. 948만 5천 원의 농업소득인데도 불구하고 이거 감내해내고 있어.

  우리 한우농가들도 이렇게 적자를 보면서도 그걸 다 본인들이 소화를 하는 거죠. 신자유주의가 들어오면서 우리 사회가 각자도생의 시대로 변화가 돼 버렸어. 그래서 주변 안 봐. 나만 어떻게든지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고민하고 노력하는 이건 공정한 게 아니지. 1차 산업이 먹을 걸 생산하는 산업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소비자들, 시민들이랑 농업을 화두로 같이 공감대를 이루어서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할 거 아니냐. 농민들 힘만으로는 안 된다 이제. 먹을거리 중요한 것 아니냐, 소비자들과 같이 해야 된다. 그것을 계속 주장하고 있죠.

Q. 동물복지 철학

A. 나는 동물을 원래 좋아해요. 동물을 좋아해서, 개, 고양이, 소도 좋아하고. 근데 결국은 잡아 먹잖아. '좋아한다면서 왜 잡아 먹냐, 네가 키운 것을' 나한테 자문을 좀 해봤어요. 근데 산업동물이잖아? 산업동물은 경제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기르는 거고. 그렇다고 하면 살아있는 동안에는 쾌적하게 해주는 것이 내 도리 아니냐. 보통 사람들은 고급육을 만들려고 그러면 개량하고 환경, 사료 뭐, 그런 걸 얘기하는데 한 가지가 동물복지다. 동물이 생존할 때 요구하는 그런 편안한 환경을 만들어 줘야 된다. 예를 들면 더우면 덥지 않게, 추우면 춥지 않게, 또 바닥이 질퍽이면 질퍽이지 않게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동물한테도 좋은 거고, 나한테 경제적 이익도 주는 거고. 앉아 있게 만들어야 된다, 사료 먹고 물 먹고 생리현상 하는 거 빼고는 앉아 있게 만들어야 된다. 그게 소한테도 복지를 줘서 좋은 거고. 또 경제적으로도 우리한테 준다. 그렇게 해주면.


Q. 가족

A. 애가 중학교 3학년 때, 중학교 2학년 때 둘을 앉혀놓고, 이 농장 물려받을 사람 없으면 너희들 하고 싶은 거 해라. 근데 누군가 하나가 나는 맡았으면 좋겠는데 싫으면 난 후계자를 하나 만들어보고 싶다. 왜냐하면 아빠 청춘을 바쳐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 정도로 만들어 놨는데, 이것이 아빠가 이 세상에 없을 때 지속되지 않는다고 그러면 아빠 인생이 너무 허무하다. 그 얘기를 하고 나도 잊어버렸지. 근데 큰아들이 대학교 들어갈 때 '내가 한번 해보겠다' 해서 온 거죠.

  그, 치부인데 이게 경제활동이잖아? 근데 내가 농장을 하면서 내가 올해 돈을 벌었는지, 돈을 벌었으면 얼마나 벌었는지 잘 몰라. 아까 얘기한 대로, 어떻게 파동 견뎠냐고 그러는데, 좀 경제적으로 힘들고 그 상황 때는 뭐... 경제적으로 조금 크게 힘들지 않다가 조금 힘들다가 그런 거야. 그렇게 했거든요. 그래서 내가 '대학원은 경영학을 해봐라' '이 경영학이 바로 그런 거 아니냐' 지금도 내가 작년에 돈을 얼마를 벌었는지, 또 까지면 얼마나 까졌는지, 어느 부분에서 내가 어떤 것이 부족해서 그런 건지, 그게 분석이 되어야지 어떻게 될 텐데 아까 얘기한 대로, 내가 부끄러운 얘기인데 잘 몰라.


Q. 같이 살아야 해요

A. 내가 항상 그런 얘기를 해요. 산업이 없어지면 너도 없어진다. 저수지 이론이 뭐냐면, 저수지에 고기가 살아요. 경쟁력 있는 농가는 밑바닥에서 경쟁력 없는 농가는 위에서 산다고 칩시다. 지금 저수지에 구멍이 뚫려서 물이 새고 있어. 새고 있으면 경쟁력 없는 농가부터 위에 사는 물고기부터 없어질 거 아니야. 근데 그걸 안 막으면 저도 죽어, 물이 다 빠져서. 근데 그걸 몰라, 조금 저가 경쟁력 있다고 또 규모화 됐다고. 소를 잘 기른다고 나는 문제 없다? 근데 물 없어지면 언젠가는 물 없어지면 저도 죽어. 다 죽어. 시간 문제일 뿐이지. 우리 산업 내가 지켜야 된다. 누구도 안지켜준다. 혼자 못 산다. 혼자 못 산다. 같이 살아야 된다.


🗓 이번 달 발생 현황
📍 럼피스킨병
  • 0918 경기도 여주군 (한우 116마리 사육)
  • 0911 강원도 양구군 (한우 27마리 사육)

🗓 지난달 발생 현황
📍 럼피스킨병
  • 8월: 경기 121, 총 121마리

📍 결핵병
  • 8월: 강원 3, 전남 15, 총 18마리
  • 7월: 강원 1, 전남 24, 총 25마리

📍 브루셀라병
  • 8월: 전남 5, 총 5마리
  • 7월: 대전 1, 전남 11, 총 12마리

더 자세한 정보는 국가가축방역통합시스템
농림축산식품부 럼피스킨 발생현황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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